의무감이 사랑으로 변하던 순간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눈 말

안지수 객원기자 승인 2024.02.22 21:29 의견 0

내가 어릴 적 티비를 보면 꼭 할머니들이 손주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먹이지 못해 안달나는 모습이 나오곤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 때까지. 주변 친구들이 명절이 끝나고 살쪄서 왔다는 말을 하며 투덜거릴 때마다 나는 늘 의아했다.

‘할머니가 먹을 걸 챙겨주면서 예뻐하신다고?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내가 할머니가 없었던 건 아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모두 정정하게 살아계셨다. 티비에 나오는 친근한 할머니들과 딱 하나 달랐던 점은 우리 할머니 두 분은 모두 엄청 무뚝뚝한 분들이셨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된 뒤에 친할머니가 챙겨주시는 김치, 나물, 떡, 참기름이 할머니가 내게 표현하는 최대의 사랑방식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더는 서운하지 않았지만 어릴 적엔 늘 무뚝뚝한 친할머니가 많이 어려웠다.

특히 외할머니는 자식이 많았다. 이모랑 삼촌들이 많다 보니 당연히 자식들도 많았고 외가댁에 가면 거의 3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다들 사이가 좋아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었지만 할머니의 사랑은 내 차지가 아니었다. 이미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기에 할머니가 나를 보지 않는다고 서럽지는 않았지만 남들 다 받는 할머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건 솔직히 좀 아쉬웠다.

어릴 적엔 그저 친척 언니오빠들을 본다는 기쁨, 나이가 들고는 부모님의 부모님에게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이렇다 할 추억도, 감정 교류도 없는 상태로 그렇게 세월이 지금까지 흘렀다.

그렇게 며칠 전, 설날을 맞이해 외가댁에 갔다. 외할머니는 많이 아프셨고 병상에 누워계셨다. 오랜 병마로 인해 할머니의 몸은 너무나 말랐고, 손가락은 뼈밖에 남지 않으셨다. 저 멀리 서있던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시는 할머니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 손녀 지수요.”

상태가 좋은 날은 나를 알아보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은 알아보지 못하셨기에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침을 삼켰다. 그러자 할머니가 더듬거리며 내 손을 잡으셨다.

“그래. 왔구나. 어찌 이리 예뻐.”

무표정했던 할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 순간 긴장이 탁 풀리며 웃음이 나왔다.

“네. 할머니 저 왔어요.”

바싹 마른 할머니의 손을 꽉 잡고 앞뒤로 손을 비비며 체온을 전달했다. 그리 높지 않았던 나의 체온보다 더 낮은 할머니의 체온에 어쩐지 애가 탔다. 그렇게 할머니의 손을 꼭 잡는데 할머니가 나를 보며 말하셨다.

“이렇게 손을 잡아주니 꼭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야.”

“....그래요, 할머니? 살아나는 것 같아? 그럼 계속 잡고 있어야지.”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를 바라봤다. 총명하던 눈빛은 흐려지고 눈동자의 색은 옅어졌지만 다정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을 텐데, 할머니의 눈이 이렇게 다정하다는 걸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머니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고우셨다.

그때 할머니의 왼손을 잡고 있던 엄마가 말하셨다.

“엄마. 내가 미안해. 엄마한테 잘 못 해줘서 미안해. 그래도 내가 많이 사랑해 엄마.”

떨리는 목소리, 붉어진 눈매. 결국 엄마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셨다. 가만히 누워 엄마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보며 속상한 듯 우는 엄마. 어쩐지 미래의 엄마와 나를 보는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엄마. 지수한테 사랑한다고 해줘. 나한테 한 것처럼. 응?”

그러자 할머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며 뚜렷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지수야. 사랑해. 사랑해.”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할머니가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했을 뿐인데 뚝, 하고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어찌할 줄 모르고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 울었다. 아마 태어나 처음 할머니에게 들어본 애정 표현에 감동했던 것 같다. 적어도 죽기 전에 할머니의 사랑을 받아봤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행복이었다.

자꾸만 떨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물 젖은 얼굴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저도 사랑해요. 할머니.”

나는 아마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사랑을 듣고, 사랑을 말했던. 그저 의무감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에 진심이 담기게 된 이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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